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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들

생각 생존 이야기

by jwvirus 2012. 7. 6.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참 많은 생각을 한다. 남자들은 24시간 여자들 생각뿐이라지만, 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 시기가 분명 남자들에게 존재하지만, 남자들도 지친다. 만약 남자가 그런 꾸준함마저 갖춘 동물이었다면, 역사의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암튼, 우리들은 참 많은 시간을 ‘생각’으로 채운다. 물론, 최근 그런 생각의 영역을 침범하는 물건들- 이를테면 스마트폰이라든지-이 등장했지만, 아직 ‘생각’이란 분야는 비교적 큰 흔들림없이 번영을 구가 중이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생각들을 어떻게 하는가. 이를 전부 끄집어 내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아니,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결코 생각은 머릿속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 잠깐. 성직자, 교수, 연예인 등 ‘말’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은 예외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한데 그들이 반드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고 가정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남의 생각을 그럴싸하게 포장한다든지, 다른 나라의 생각을 수입하는 수입상, 아니면 그저 생각없이 주둥이만 움직여 웃기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뭐,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과 반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수많은 생각들은 대부분 태어남과 동시에 사라져 간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 인류는 아직 그렇게 스러져 가는 생각들에 대해서는 아직 속수무책인 것이다.

생각은 두 가지 형태로 변형된다. 하나는 ‘기억’이다. 하지만 ‘낫 놓고 기억도 모른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이 기억만 등장하면 참 자신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드라마 <연애시대>의 대사처럼 ‘기억은 늘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의 제멋대로적 성질은 그 내재성에서 기인한다. 생각이 기억으로 변하여도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뇌피질 밖을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컨트롤하기 어려운 ‘뇌’란 곳에 담겨진 기억은 좋은 것만 남기고 나쁜 것은 슬쩍 버린다든지, 아니면 아전인수격으로 변신하기 일쑤다. 그래서 수많은 생각들이 기억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필요에 따라서는 변한다. 이 지점을 아직은 우리는 무책임하게 또는 무정하게 내버려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모르긴 몰라도 생각의 약 99% 이상이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1%의 생각은 살아 남는다. 이것이 생각의 두번째 변신이다. 이제 생각은 생각을 벗어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주체로부터도 탈출한다. 역시 이렇게 과감하고도 용기있는 생각만이 생존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그래서 창조적 파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열매는 ‘생존’일 뿐이다. 그렇다. 자신을 버린 대가로 세상이 주는 것은 생존이라는 입석표 정도 뿐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생각들, 그래서 자신을 탈바꿈하고 알을 깨고 나온 모든 것을 우리는 ‘표현’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영어로 표현이 Express가 아니겠나. 즉, 압력(Press)으로부터 벗어남(exit). 알을 깨고 나오는 그 생명력! 

이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말’이다. 언어라고도 불리고, 스토리라는 명칭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저 ‘수다’로 폄하되는 ‘말’. 사실 그 확률적 희소성과 생존의 치열함을 알고도 우리가 ‘말’을 단순히 수다로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선 다소 의문이 든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말’의 탄생(혹은 생각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을 수없이 보게 된다. (말을 듣는 것과는 달리, 말의 배경을 주목하게 되면 우리는 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태어난 ‘말’의 말로가 탄탄대로는 절대 아니다. 말은 또다시 생존 경쟁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그 말 자체가 빼어난 미모를 기본덕목으로 갖추었는지가 문제된다. 그렇다, 다른 것보단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본 중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수많은 말들은 또다시 허공으로 사라져 간다. 제 아무리 진실하더라도, 또는 중차대하더라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말은 아름다워야 한다. 매력 없는 말은 사라진다. 허망하다고 항변해도, 아니면 정의롭지 않다고, 진실은 가려진다고 외쳐봐야 상관 없다. 이러한 심사에서 느슨한 구석 혹은 코털만큼의 인정도 없다. 철저히 미/추의 기준으로 가려질 따름이다. 아마, 추정컨대 또다시 약 1%만이 가까스로 이 기준을 통과하지 않을런지.

‘말’이 생각을 벗어나는 자기파괴적 혁신이란 1차 시험을 통과하고 또 ‘아름다움’이라는 2차까지 통과했더라도 여전히 최종 탈락할 수가 있다. 마지막 3차 관문은 바로 ‘청자에게 들리는 것’이다. 말은 이를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를 우리는 ‘청자’라 이름한다. 문제는 이 청자는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들을 수 있는 자와 들을 수 없는 자로. 청자의 달팽이관은 ‘말’이 올라탄 음파를 감지한다. 이는 다시 신경을 타고 청자의 ‘뇌’로 들어간다. 이런 점에서 음파를 감지할 신체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청자의 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체적 능력과 상관없이 고약한 점이 있다. 바로 청자도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다. 청자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뇌신경을 타고 온 ‘말’이 들릴 수도 안 들리 수도 있다. 청자가 만약 ‘말’이 가져온 메시지와 상통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라면, ‘말’은 들린다. 그 반대의 경우는 ‘말’은 다시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간다. 즉, 청자의 생각의 내용에 따라 말의 들림은 성공되거나 좌절된다. 이것이 마지막, 3차 시험이다. 아마, 이번에는 그 확률이 1차나 2차보다 훨씬 낮을 것이다. 생각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런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그런 만남이 그만큼 희귀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것에는 기억을 잘 할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그저 사라져 가고 있는지, 그 답답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생각이 기억화되는 과정에서의 손실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생각에서 벗어나 표현이 된 이후에도 청자와의 거리만큼, 또한 청자와의 상이함만큼 생각들은 사라져 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저장되지도, 전달되지도 않는 수많은 생각들이 애초에 왜 필요했을까?

인간의 위대함을 거론할 때 사람들은 주저함 없이 ‘생각’ 또는 ‘사고’를 꼽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생각만큼 비효율적이고, 또 비생산적인 시스템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나의 말을 들을 수 있을까?